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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elopment and Design of Modern Europe Chintz
Development and Design of Modern Europe Chintz
Fashion & Textile Research Journal. 2012. Apr, 14(2): 211-221
Copyright ©2012, The Korean Society for ClothIng Industry
  • Received : August 08, 2011
  • Accepted : February 02, 2012
  • Published : April 3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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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Authors
Kyung-Hee Lee
k.lee@kumoh.ac.kr
Abstract
The word ‘chintz’ is thought to be a corruption of spotted cloth. Printing remained a relatively primitive method of decorating textiles in Europe until the second half of the 17th century. The formation of the English East India Company sparked the influx into the West of painted and printed Indian cotton textiles. A William Sherwin took out the first English patent in 1676. The earlist European designs were florals in the Indian manner. Patterns of European flowers returned to England as birds, flowers, trees, vines and stained glass for Victorian chintz. In France, the original and most successsful manufacturer of the distinctive printed fabrics from Jouy was Christophe Philippe Oberkampf. Copperplate printing was introduced to Jouy in 1770, probably reaching the pinnacle of achievement in the craft after 1783 when Jean-Baptiste Huet became chief designer. Huet's style was widely imitated in France and abroad, and the term 'toile de Jouy' has come to be universally applied to monochrome figurative designs wherever and by whomsoever they were produced. Oberkampf served his apprenticeship as an engraver with some leading manufacturers, including a period in Mulhouse. In Alsace, which was not part of France until 1798, the first factory had opened in 1746 in Mulhouse, and the area soon had the largest number of print-works in France.
Keywords
1. 서 론
경사(更紗)는 색과 무늬에 특색이 있는 면직물을 지칭하는 용어로 영어의 친츠에 해당한다(KDR, 1997). 경사의 문양은 날염(捺染)이 주가 된다. 날염은 직물에 장식하는 가장 오래된 기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물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날염에 의한 프린트 직물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어디에서 발달했는지 명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스튜어트 로빈슨(Stuart Robinson)은 『프린트 직물의 역사』에서, 기원전 2,000년경에 코카서스 지방에서 프린트 직물은 이미 만들어졌다고 했고, 인도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에 천염염료인 꼭두서니에 의한 프린트 블록(목판에 의한 날염 직물)이 행해졌다고 서술하였다 (Tuzi, 1996). 그러나 그 발생에 관한 증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목조의 소상(塑像)과 바위그림과 벽면장식, 또는 기록으로부터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명확한 사실로는 이미 기원전 1,400년경 인도에서는 날염 직물이 성행하였고, 그것이 인국과 중국 등에 수출되어, 그 곳에서 귀중히 여겨지고 모방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인도야말로 날염 직물의 발상지이고, 그 인도로부터 해로와 육로를 거쳐 흑해와 지중해,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그리스, 로마에까지 날염 기술이 보급되었다. 이것과 관련하여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가 인도 경사를 지칭하여 「천국의 화단을 연상케 하는 눈이 취할 듯한 꽃무늬」와 같은 경탄을 보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시대에 이미 인도 경사가 유럽에 수출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집트 초기 왕조의 분묘로부터는 많은 정교한 마직물이 발견되었는데, 날염 직물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분묘의 벽화 등에 그려져 있는 복식의 디자인에는 날염 직물로 추측되는 패턴도 보인다. 특히, 제12왕조 분묘의 벽화에는 분명히 날염되었다고 생각되는 각종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멘넴하트(Amenemhat)의 비 호테프트(Hotept)의 드레스에는 별 모양의 마름모꼴 문양의 패턴이 그려져 있고, 또 그의 아들인 차넴호테프(Chnemhotep)의 의장에는 산형문양(山形紋樣)과 뇌문(雷紋) 등의 문양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양이 날염 기법에 의한 것이라면 날염 직물의 역사는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Tuzi, 1996). 이처럼 인류의 장식본능과 더불어 발전해 온 날염 직물이지만, 그 발전과정을 탐구하는 연구는 미흡한데, 본 연구에서는 근세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경사의 발전과 디자인을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연구방법은 문헌고찰을 중심으로, 박물관과 전시회에서의 유물조사를 통하여 고찰하였다.
2. 날염 직물의 기원
역사상 현존하는 날염 직물의 가장 오래된 유물은 4세기경 파노폴리스(Panopolis)의 코프트(copt, 아프리카에 살던 기독교인)인의 분묘 중에 서 발견된 예이다( Fig. 1 ). 날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로버트 포러(Robert Forrer)에 의하면, 이 유적에서 발견된 날염 직물은 흔히 있는 천의 단편이 아니고, 완전한 형태를 갖춘 어린이용 마제(麻製)튜닉이었다. 이러한 튜닉은 마름모꼴로 날염되었고, 그 옆에는 날염에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는 목판과 원통상의 판목의 단편이 남아있었다. 그 판목은 무화과나무로 만들어졌고, 거기에는 리피트(repeat)가 명료한 「생명의 나무」와 「공작」을 표현한 패턴이 각인되어 있었다.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분묘 중에 놓여진 매장품은 명백히 사자(死者)의 생전의 직업과 지위를 암시하는 것을 놓았다고 하므로, 이 분묘 내의 사자가 생전에 염색가였다는 것, 또 염색이라고 하는 일이 이미 사회적인 직업으로 인지되었던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Lee, 2011).
같은 파노폴리스에서 6세기경으로 생각되는, 목판을 사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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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d's tunic in Panopolis(4C), Sei, 1995, p.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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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en print block in Panopolis(8C), Sei, 1995, p. 70.
3색 사용의 목면제 날염 직물이 발견되었고, 전술한 4세기의 것과 비교하면 명백한 기술적인 진보를 엿볼 수 있다.
리처드 그레이저(Richard Glazier)의 기술에 의하면 같은 파노폴리스에 9세기경의 직물 단편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염(藍染) 바탕에 백색 로제트문양이 그려진 고도의 날염 직물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유물의 대부분은 그리스와 비잔틴교회의 제단 덮개와 천개(天蓋)에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Fig. 2 ). 어쨌든 인도를 발상지로 하는 날염 직물 생산이 이집트의 코프트인에게서는 4세기경부터 하나의 직업으로서 확립되었고, 수준높은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러한 유물에 의해 증명된다(Sei, 1995).
3. 유럽에 전해진 목면
유럽에서 생산되지 않은 목면에 관하여, 최초로 나타난 기록은 상술한대로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인도에서 식물로부터 얻어진 상질의 직물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기록이다. 영국 상인과 아라비아 상인이 인도에서 면의 거래를 했다는 기록도 1세기경에 나타난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수입되었다고 하는 기록도 의복에 사용되었다고 하는 기록도 거의 없다. 파르미라의 발굴에 의해, 인도의 면포가 확실히 로마의 속주에 전해졌다고 하는 것은 분명해졌지만, 면포에 관한 특별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므로, 사용이 빈번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9세기 이후, 이슬람교도가 지중해에 세력을 확대한 시기에 면과 면화 재배가 유럽에 들어왔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 아라비아인이 정착한 이베리아반도에서는 10세기에 면화의 재배가 시작되었다. 면화 재배는 키프로스와 말타와 시칠리아와 같은 지중해의 섬들과 북아프리카에까지 확대되었고, 13세기에는 이탈리아 상인에 의해 상당한 양의 면이 유럽 내부로 운반되었다. 당시의 유럽에서 면은 주로 양초의 심과 의복의 충전물로서 사용되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면과 울과 마를 혼직한 거칠고 두꺼운 직물도 만들었다.
면을 의미하는 코튼(cotten)은 아라비아어 ‘qutn, qoton’을 어원으로 한다. 중세 프랑스어에 ‘alqueton’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관사를 붙인 아라비아어 ‘al-qutn’으로부터 왔고, 갑옷 아래에 입는 면을 넣은 베스트를 말한다. 즉, 면이 충전물로서 사용된 것을 여실히 전해주는 말이다.
혼직의 소재로서 이용된 경우는 특히 중세의 기록에 잘 나타나는데, 린넨과 혼직된 파스치안(fustian)이 있다. 이 단어는 카이로항 포스타트(Fostat)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 이 항구로부터 유럽을 향하여 면사와 면이 보내어졌다고 생각된다. 포스타트는 나일강으로 부터 홍해로 운하가 생긴 1세기경부터, 인도와 연결되는 무역항으로 번영하였고, 7세기에 이슬람인이 야영지(아라비아어로 ‘al fostatt’라고 했다)를 여기에 둔 것에서 이 지명이 생겼다. 포스타트는 중세의 면포가 다수 발굴된 장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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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 printed linen(14C), Janiffer, 1995, p. 224.
서도 알려져 있다.
한편, 그리스어로 면을 의미하는 ‘bombux’라는 단어도 이탈리아에 들어와, ‘bombagia’가 되었다. 이 단어는 프랑스에서는 bombasin(영어의 ‘bombazine’)이 되고, 면에 울과 실크를 섞은 혼직포를 지칭하였다(Tuzi, 1996).
유럽에 도착한 면과 면포가 충전면과 초심 등의 재료와 싼 값으로 혼직에 이용된 것을 생각하면, 고래로부터 토착의 기법으로 짜여지고 염색된 인도산 면포는 직접 중세 유럽에 들어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인도의 프린트면을 직접 유럽의 항구에 들여온 것은 15세기 말에 인도 항로를 발견한 포루투갈인이었다고 추측된다.
한편, 염색에 의해 문양을 찍는 방법은 유럽에는 없었다. 그러나 조사해보면 확실히 유럽에도 책의 인쇄법을 흉내내어, Fig. 3 과 같이 안료와 염료를 사용하여 천에 형을 찍는 시도는 있었다(Janiffer, 1995). 또한, 15세기에 이탈리아와 뉘른베르크에서 린넨과 실크에 프린트를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고, 16세기에는 벽지의 형압인쇄가 있었다.
16세기의 영국에서는 의상을 만드는 직물에 직접 문양을 수화(手畵)하는 예도 있었는데, 일시적인 채색을 함에 지나지 않아 날염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처럼 염색에 관해서는 유치한 기술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유럽에 인도의 프린트 면은 색의 다채로움과 염색의 견뢰도에서 실로 경이로운 천이었고, 그때까지의 유럽인의 취향을 뛰어넘을 정도로 매력이 있었다( Fig. 4 ).
인도 면포와 날염 면포는 17세기 초기에 설립된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유럽시장에 운반되었다. 면포는 동인도회사에게는 예상 외의 수익을 가져왔고, 17세기 말에는 유럽에서 인도 날염 면포의 붐이 일어난다. 18세기의 유럽은 이 새로운 소재인 면에 주목하고, 면포의 생산과 날염법을 개척하여, 자국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을 시도했다. 면사 방적의 개량이 더해지고, 날염 기술을 습득하고, 대자본을 투하하여 공장생산을 추진한 결과는 산업혁명의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유럽의 날염 면포는 일반적으로 신화나 역사속에서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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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an palampore(chintz cover), Patricia, 2000, p. 108.
사적인 장면으로 장식되는 경우가 많았다(Christa, 1992).
이처럼 1세기 이상 계속되어온 날염 면포에 대한 열광과 집착은 유럽내 뿐만 아니라 면화를 생산하는 아메리카 식민지에도 미쳐, 사상 유례없는 국제적인 경쟁을 전개해갔다는 점에 유럽 면직물 역사의 특성이 있다.
4. 영국에서의 경사의 발전과 디자인
- 4.1. 영국에 들어온 인도의 날염 면포
영국이 1600년에, 네덜란드가 1602년에 설립한 동인도회사는 당초 후추와 같은 향신료를 말레이반도로부터 수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본국을 떠난 배는 인도에 머물러 면포를 사고, 그것을 말레이반도에 운반하여 후추를 산다고 하는 삼각무역의 형태를 취하였다. 또한 1630년대에 인도 면포는 서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의 교환품에도 활용되었다. 서아프리카에서 인도 면포는 노예를 대신하였으므로, 서인도제도에서 노예를 팔고 설탕과 면포를 사서 본국에 가지고 갔다.
교환품이었던 면포의 재고는 영국에 가지고 돌아가 런던에서 경매되었다는 1613년의 기록도 있다. 교환품은 줄무늬와 체크의 싼 날염 면포였는데, 동인도회사의 사원에게는 런던의 경매가 상당한 이익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런던에 들어가는 날염 면포의 양이 점차 늘어가고, 1631년에는 동인도회사의 정식 수입품목이 되었다.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인도로부터 유럽에 수입된 것은 코로만델 해안지방(Coromandel Coast)의 친츠(chints, chinzs)와 캐리코(calico)가 주였다. 친츠는 ‘잡색’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인 ‘chitra’로부터, 혹은 반점이 있는 천을 의미하는 힌두어 ‘chint’로부터 온 단어로, 염색한 면포를 가리킨다. 포루투갈어로는 ‘pintados’로 부르는데, 얼룩을 의미하는 포루투갈어인 ‘pinta’에서 유래했다. 또 캐리코로도 불리우는 것은 포루투갈인이 기항한 항구마을 ‘카리카트(Calicut)’로부터 왔다. 그밖에 인도의 면이라고 하는 의미로 ‘인디안느(Indianne)’라고도 불리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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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an printed chintz Tuzi, 1996, p. 71.
다. 이러한 용어는 모두 「문양을 염색한 면포」를 가리킨다(Tuzi, 1996).
1643년에 런던에서 행해진 경사 경매의 가격은 예상보다 낮았다. 당시 인도로부터 수입된 것은 퀼팅(quilting)된 면 프린트의 베드커버와 큰 벽걸이용포, 그리고 행잉(hanging)이 중심이었는데, 바탕색은 인도의 꼭두서니 염색에 의한 암적색이 많았다.
경사의 매상을 높이기 위해서 영국인 기호의 날염 면포가 인도에 주문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런던에 수입된 것은 교환품으로서의 면포만은 아니었다. 당시 인도에서도 궁정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장식용의 고급 수화 면포도 있었다. 이후, 유럽인의 취향을 전한 것이 효과를 나타내, 런던에서의 경매가격도 높아지고, 주문도 늘었다.
1662년에는 최초로 날염용 디자인화가 인도에 보내어졌고, 이후 유럽 취향의 색과 디자인이 지정되어 갔다. 질이 높은 코로만델 해안지역의 수화의 날염제품이 특히 기호되어, 행잉과 베드커버의 주문이 대량으로 행해졌다. 현재 남아있는 오래된 경사 유품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품디자인은 인도 전통의 디자인이라기 보다는 유럽의 취향을 받아들인 인도풍의 식물문양이었다( Fig. 5 ).
한편,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다투어 대량으로 후추를 수입하였기 때문에 후추의 가격은 하락하였고, 그 결과 1680년 이후에는 후추 대신 경사의 수입이 급증하였다. 또한, 양국내에서도 경사를 흉내내어 날염포 제조에 손을 댄 공장도 나왔다. 한편 경사의 수입 증가는 국내의 직물업자들에게는 위기감을 줄 정도였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실크산업을 정착시키기 위한 장려책이 취해졌으므로, 실크산업의 보호를 위하여, 1686년에 경사의 수입과 국내에서의 경사 제조를 금지하였다. 영국은 수입한 경사의 절반을 유럽에 재수출 하였으므로, 프랑스의 수입금지령은 타격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의 수입금지령은 철저하지 않았으므로 밀수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1692년에는 경사의 착용금지령이 보완되었다(Tuzi,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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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s and birds printed chintz(18C), Tuzi, 1996, p. 72.
영국에서는 모직물업계의 반발로 1700년에 경사와 실크의 수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서아프리카를 향한 재수출품이라고 하는 명목으로 배는 인도에 기항하였고, 백면포의 수입은 금지되지 않았으므로, 국내에서 경사로 가공되어 출하되었다. 이러한 억압상황이 철저하게 된 것이, 1720년에 나온 인도 날염포의 착용 금지령이었다. 경사는 실크에 비하여 아름다움이 떨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가격은 실크의 1/3에 불과한 염가였으므로 실내장식포로서, 의상의 소재로서 널리 환영되었다. 국가가 종래의 직물업을 보호하기 위한 강경책을 취하여도, 면포의 수요는 줄지 않았다( Fig. 6 ).
- 4.2. 경사의 유행
큰 베드 커버와 행잉에 염색한 「꽃피는 나무(floweringtree)」( Fig. 5 )의 모티브는 가장 두드러진 영국 취향의 모티브이다. 바위와 땅으로부터 뻗은 한그루의 나무 줄기와 가지에는 이국적인 과실과 꽃이 만개한 구도인데, 오리엔트 고래의 모티브인 생명의 나무(聖樹)를 연상시켜, 색채의 선명함과 풍요로운 형태가 매력적이다.
부유한 중산계급에서 저택을 장식하기 위한 가구용포(布)로서의 경사는 실로 적합한 재료였다. 일찍이 1641년의 어느 회계기록에 의하면, 실내의 행잉은 물론, 베드의 캐노피(天蓋)로부터 바닥의 카펫까지, 모두 경사를 사용한 예가 기록되어 있다. 일기를 남긴 사무엘 피프스(Samuel Pepys)도 1663년의 일기에서 수화염의 인도 캐리코를 처의 서재를 장식할 벽포로 구입하고, 「대단히 아름다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사는 실내장식만이 아니고 의복에도 사용되었다. 피프스는 자신이 인디안느의 가운을 구입하였고(1661년), 2년 후에는 처에게도 사주었다고 했다(Tuzi, 1996). 이처럼 선명한 문양염의 경사는 남녀의 실내복에 이용되었고, 특히 인도 경사의 수입 금지가 없었던 네덜란드에서는 대유행이었다.
높아가는 날염 면포의 인기에 대하여 모직물 생산업자의 불만은 컸다.
귀족계급의 여성은 겉감에 경사를 사용하고 안감에 고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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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tz petticoat(18C), Tuzi, 1996, p. 73.
벨벳을 사용한 로브를 입었다. 백생지에 날염된 이국풍 프린트의 꽃문양은 영국 자수의 모티브에도 응용되었고, 특히 18세기 유럽의 실크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Fig. 7 ).
- 4.3. 영국의 경사(빅토리안 친츠)의 탄생과 발전
인도에서 제작된 「인도 경사」는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17세기 초부터, 대량으로 유럽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인도 경사가 갖는 견뢰한 염색기술, 다채로운 채색, 이국적인 문양, 가볍고 부드러운 천의 매력은 즉시 귀족계급을 비롯하여, 남녀 시민계급까지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다투어 ‘인디안느(Indiennes)’ 와 ‘사라트(Suratas)’ 등으로 부른 인도 경사를 사 모았고, 그 때문에 유럽 각국의 국가재정이 일시 위기에 처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멋장이 부인들은 이 인도 경사로 장식성이 풍부한 드레스를 만들었고, 신사들은 이 날염 면포로 실내복을 만들었다.
이러한 인도 경사의 유행은 1684년에 샴의 대사가 베르사이유궁전의 루이14세를 방문하기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경사에 대한 열광은 정상적인 무역을 통해서 수입되는 양을 훨씬 상회하였기 때문에 대단히 고가였고, 따라서 유럽각지에서는 인도 경사를 제작하려는 시도가 생겼다.
그 최초의 시도는 17세기 중기 독일과 포르투갈이 인도 경사의 이미테이션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리지널 인도 경사는 동양에서 제작되었으므로, 이국적인 눈부신 채색과 정교한 패턴이 이미테이션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즉, 당시 서양 제국의 직인 기술로는 목판 프린트와 납방염이 기술적으로 고도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오리지널 인도경사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여러가지 시도 끝에 유럽에서 처음, 정교한 인도 경사가 만들어진 것은 1670년대가 되어서였다. 1676년에 영국인 윌리엄 셔윈(William Sherwin)이 날염기술에서 실용특허를 취득하고, 처음 인도 경사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영국 경사」를 제작한 것이다. 이후 14년간 영국 남부인, 리치몬드, 웨스트 함, 랑베스, 버몬드 세이 등에 수많은 날염공장이 설립되었다.
1685년「낭트칙령」의 폐지에 의해, 영국에는 수많은 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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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ian chintz(1856), Christa, 1992, p. 99.
노교도인 프랑스인이 도래했는데, 그중에는 견직물 기술자, 펠트모 직공과 더불어, 많은 날염 기술자도 있었다. 그 중, 한사람인 네덜란드 출생의 프랑스인이 리치몬드에서 영국 최초의 목면 날염공장을 만들었고, 비즈니스의 성과를 충분히 올려, 많은 남녀를 이 공장에서 고용하였다.
영국에서는 19세기 중기부터 20세기 초기의 빅토리아여왕의 통치시대(1837~1901)를 「빅토리아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날염은 「빅토리안 친츠(Victorian Chintz)」로 알려졌다( Fig. 8 ).
1800년경의 영국의 날염업은 프랑스혁명에 의해 영향받은 프랑스의 날염업보다 활황을 보인다. 그들 작품의 대부분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인도경사에서 영향을 받은 이국적인 패턴으로, 인도의 꽃들, 시누와즈리(Chinoisery),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의 패턴까지 우수한 목판기술을 살린 작품을 대량 생산하였다(Christa, 1992).
한편, 1783년에는 스코틀랜드인 토머스 벨에 의해 로타리 프린트(Rotary Print)의 특허 신청이 이루어져, 1790년 이후, 프레스톤지방을 비롯하여 점차 날염업자들에게 보급되어 갔다. 단, 이 로타리 프린트는 1810년경까지 극히 염가의 단색물에 한했으나, 기술적으로 개량을 더하여 대단히 정교한 롤러조각과 제판이 만들어졌고, 가구용의 대형 프린트도 가능해졌다. 빅토리아여왕 초기인 1930년대는 소위 ‘팬시 머신 그라운드(fancy machine ground)’로 불리우는 지문넣은 정교한 그라운드까지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혁신에도 불구하고, 당시는 아직 2~3색 밖에 제판할 수가 없다는 제약도 있어, 보통은 레드, 블랙, 세피아로 기본적인 패턴을 롤러 프린트하고, 다른 색은 블록 프린트에 의해 표현하는 복잡한 방법이 취해졌다.
롤러 날염의 개발과 동시에 염료의 급진적인 개발도 촉진되어, 새로운 염료가 차례로 개발되었다. 1810년경에는 일부 퇴색성이 강한 색으로 염색된 염가의 염포를 제외하고, 거의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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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tern-book of block printed furnishing cottons(1830), Jeniffer, 1995, p. 228.
물염료인 머더, 인디고, 시트론에 의해 염색되었다. 한편, 프랑스, 영국의 과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수많은 새로운 미네랄염료(광물염료)인 망간 브라운, 크롬 옐로우, 안티모니 오렌지 등이 발견되었다. 이후, 점차 그러한 광물염료를 사용하여 새로운 프린트직물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광물염료 발견의 결과, 1835년에는 18세기 이래 전통적이었던 컬러 팔레트는 완전히 변하게 된다. 영국에서는 친츠의 색사용에 따라, ‘호울 친츠(whole chintz)’와 ‘하프 친츠(half chintz)’로 나누었다. 호울 친츠는 적색 3색, 자색 2색, 청색, 녹색, 황색의 8색을 사용하였고, 이중에서 적색 2색과 자색1색을 뺀 5색을 사용한 것을 하프 친츠라고 하였다(NHK, 1995).
그러나 이것도 1956년 퍼킨에 의해 최초의 합성염료인 모브(mauve)가 발견되기 20여 년 전의 일이다. 모브 이후의 합성염료는 랭커셔의 날염업자들에 의해 롤러 날염에 받아들여지고, 정교한 제판기술의 개발과 더불어 정교한 문양을 선명한 색으로 표현해내게 되었다. 이로써 소위, 빅토리아조의 수많은 우수한 날염포가 생산되게 된 것이다( Fig. 9 ).
- 4.4. 빅토리안 친츠의 디자인 유형과 특성
빅토리아왕조의 염직문양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화조를 자연그대로 그리는 꽃의 묘사주의이다. 주요한 모티브는 초기의 인도 경사에 영향을 받은 이국풍 꽃들로 시작하여 점차 서양 본래의 꽃인 장미, 라일락, 수국, 양귀비, 자스민 등이 피었고, 그 외 양치류의 잎, 넝쿨 등의 문양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양은 어떤 때에는 수직으로 늘어나는 세로 스트라이프문양으로 구성되기도 하고, 다양한 야조와 함께 레이아웃되는 사실적인 패턴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19세기 전반의 빅토리안 친츠는 자연계의 꽃의 보고라고 할 상황이었다(Sei, 2006). 이러한 빅토리안 친츠의 디자인 유형과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아메리카의 새들: 1830년 전후에는 제임스 오스본의 『아메리카의 새들』(The Birds of America, Fig. 10 )이라는 도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날염물이 많았다. 엑조틱한 야조와 꽃잎을 테마로 한 날염포가 대단히 인기를 끌어, 그 이래 자연의 꽃과 동시에 엑조틱한 새들과 나비 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문양이 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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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n birds(1830), Sei, 2006, p.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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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m and peacock(1815), Sei, 2006, p. 187.
프린트 뿐만 아니라, 롤러 프린트에서도 다량으로 제작되었다.
2) 종려와 야조: 빅토리안 친츠의 대표적인 문양의 하나에 종려나무를 이국적인 야조와 배치시킨 패턴이 있다( Fig. 11 ). 새는 뇌조나 꿩인데, 많은 변형이 제작되었다. 종려가 세로줄의 스트라이프가 된 것, 전체적으로 배치된 것, 종려나무와 꿩이 풍경에 그려진 것 등 다양한 패턴이 있는데, 현대까지도 인기가 있다. 이러한 문양의 대부분은 목판 프린트인데, 롤러와 목판을 병용한 정교한 것도 다수 제작되었다.
3) 화수(花樹)문양: 1820년대의 날염업자는 새로운 염료의 사용에 의해, 종래와 다른 캐리코 프린트의 개발에 몰두하였다. 예를 들면 1820년대에 들어서자 화수문양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 그것은 옐로우 그라운드에 식물염료로 문양을 날염하거나, 블루 그라운드, 그린 그라운드 등으로 배색이 바뀌어 나타났다. 문양에는 제라늄, 자스민 등이 인기였다. 그 외, 이국적인 화수문양을 세로 스트라이프에 밀집하여 배치하는 것이었는데, 제판기술의 향상과 맞물려, 대단히 화려하고 정교한 프린트로서 유행하였다.
1815년부터 1824년경까지 당초문양의 보더가 유행하였다. 보더 부분에는 당초문양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었고, 그 외의 부분에는 작은 꽃의 밀집문양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었다( Fig. 12 ).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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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 stripe(1790), Sei, 2006, p.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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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ined glass(1830), Sei, 2006, p. 188.
러한 보더는 커텐 등에 사용되었다.
4) 스테인드글라스문양: 19세기 중기경의 고딕 리바이벌 운동은 염직품의 모티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당시의 건축물에 고딕적인 스테인드글라스의 창이 많이 받아들여졌는데, 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프린트문양으로서 받아들여 유행하였다( Fig. 13 ).
5) 드랍 컬러 스타일(drab color style): 드랍은 ‘침착한 갈색’이라는 의미인데, 19세기 초가 되자 종래의 바랜 인도 경사풍의 다크 컬러의 그라운드가 적어지고, 점차 이 드랍 컬러 스타일의 문양이 많아졌다. 이외에도 옐로우 버프, 브라운 등이 주류가 되고, 종래의 패턴에서 보여진 매더 레드가 사라졌다. 이 드랍 스타일에서 가장 지도적인 사람은 리처드 오베이라는 런던의 가구날염업자였다. 그가 창안한 드랍 스타일의 특징은 패턴의 스케일이 작아지거나, 모티브에 도토리나무, 느티나무, 자스민, 백합, 라일락과 같은 작고 군생하는 꽃이 많고, 그것이 세로 스트라이프로 구성되거나, 사선으로 배열된다( Fig. 14 ). 이 드랍 컬러 친츠의 유행에 의해, 종래 무겁던 다크 칼라의 영국 경사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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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e(1799), Sei, 2006, p.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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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pis style print(1808), Sei, 2006, p. 189.
6) 라피스 프린트: 19세기 초, 매염제의 발견에 의해, 라피스 스타일이라는 블루 그라운드에 다른 염료를 직접 날염하는 방법이 개발되어 인기를 모았다. 이 매염제를 이용함으로, 블루 그라운드에 레드의 작은 물방울을 직접 프린트하거나, 경계선없이 레드를 날염하는 등 여러가지 시도가 가능해지고, 염색품도 한층 진보하게 되었다( Fig. 15 ). 이 라피스 프린트는 현대 아메리카의 퀼트 프린트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5. 프랑스에서의 경사의 발전과 디자인
- 5.1. 프랑스 경사의 탄생 배경
프랑스에서는 수화염(手畵染)의 천을 ‘트왈 팡토(toile peinte)’로 불렀는데, 경사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트왈 팡토는 일찍이 1580년대에 오리엔트의 스파이스와 도자기와 함께 포루투갈 상인에 의해 마르세이유에 들어왔다. 17세기 전반에는 포루투갈을 대신하여 인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중개 무역에도 진출한 네덜란드와 영국이 인도 면포와 스파이스의 수입을 독점하였다. 인도 면포는 색이 아름답고, 세탁 견뢰도도 우수하였다. 또한, 이국적인 신기한 문양으로 주목되었고, 의상과 가구포로서의 트왈 팡토는 점차 크게 유행하였다. 이 트왈 팡토는 「안디엔느(Indiennes)」, 「사라사(Suratas)」등으로도 불리우며 프랑스 상류사회에도 유행하여, 1670년에는 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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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an cotton dress(1835), Kyoto, 1980, p. 26.
에르가 그의 작품 천민귀족에서 천민이 인도 경사를 입고 있는 것을 조롱하여 쓰고 있을 정도였다. 문호 몰리에르는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작가이므로, 이즈음 이미 인도사가 상당량 수입되었고, 벼락부자인 시민계급에까지 만연하게 된 것을 엿볼 수 있다.
17세기 유럽 각국에서는 독자적인 경사를 만들려고 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17세기에 설립된 동인도회사는 이 날염직물의 거래에 힘썼다. 그들은 고객을 끌기 위하여 유럽의 디자인을 인도에서 염색하였다.
인도 경사와 유럽 경사에 대한 열광은 역으로 자국의 다른 섬유산업인 견직물, 모직물, 마직물 공장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1686년에 루이14세가 경사의 사용금지령을 내렸고, 이것은 1759년경까지 계속되었다(NHK, 1995). 1688년부터는 문양염 면포의 매매도 금지했다. 이어 1689년에는 아마와 대마, 1701년에는 샤모와즈, 1702년에는 프랑스에서 생산된 마직물, 면직물에 이어서 견, 모직물에 대한 날염이 차례차례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인도 경사에 대한 동경과 열광은 이 금지령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대량의 밀수가 행해졌고 유행은 한층 강해져, 18세기 중기에는 가장 엄한 금지령을 낸 프랑스에서 조차, 날염 생산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 금지령이 유효했던 1750년대 조차, 퐁파두르부인을 비롯한 궁정의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인도 경사를 즐겨 입었다. Fig. 16 에서 보는 것처럼 이러한 유행은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Kyoto, 1980).
이처럼 우여곡절을 거쳐, 여러 경제학자, 정치가, 종교가 등의 인도 경사 금지령에 대한 의견ㆍ반론이 나오자, 각국 정부도 점차 인도 경사 금지령이 속행하는 것은, 결코 자국경제에 득만이 아니고 실도 많다고 하여, 결국 1759년 9월에 이 「인도 경사의 수입ㆍ제조의 금지령」이 폐지되었다. 금지령이 최초로 발령된 이후, 실로 73년만의 일이었다. 이후, 각국은 「유럽 경사」의 생산을 경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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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printed fabric in Alsace(1760), Sei, 1995, p. 77.
18세기 중기까지 유럽의 날염업자는 아직 자력으로 문양을 창작하는 자료도 역량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는 오리지널 「인도경사」가 있었으므로, 그 문양의 이미테이션으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따라서 유럽 경사의 초기 문양은 엑조틱한 동양의 화분식물, 과실문양을 모티브로 하는 인도 경사의 전통문양을 다소 변형한 것이거나, 진짜를 그대로 복제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Fig. 17 은 1760년경의 알자스지방의 날염 문양인데, 이것과 마찬가지 모티브인 인도 경사를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18세기 중기로부터 후기에 걸쳐, 점차 로코코문양의 영향을 받아, 자연주의적 경향이 강해지자, 꽃의 작가들과 리용의 견직물 모방과 고블랑 직물 등을 아이디어 소스로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특히, 파리의 식물원과 동양, 지중해 주변의 새로운 꽃의 종류가 소개됨에 따라, 그 경향에 한층 박차가 가해져, 유럽 경사의 주제는 엑조틱한 꽃문양만이 아니고, 서양의 오리지널 꽃문양으로 이행해 갔다. 모티브로서는 작약, 장미, 수선, 히야신스, 튤립, 리라, 창포 등이 등장하였고, 초기의 인도 경사적 구도로부터, 로코코의 특징인 리본과 곡선적 덩굴, 줄문양 등으로 그 구성도 자유로워져 갔다.
문양의 크기도 초기로부터 중기에 걸쳐서는 비교적 큰 문양이 많았는데, 이후, 점차 작아지고 리드미컬한 구도의 산점문양이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프랑스의 날염에는 2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는 인도에서 배운 목판날염으로, 두꺼운 판목에 문양을 새겨 백색 목면에 날염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동판화를 응용한 동판날염인데, 이것은 유럽적인 기법으로 입체적인 인물과 풍경을 재현하는데 적합했다(Sano, 1999).
- 5.2.「쥬이 경사」의 탄생과 발전
1760년, 프랑스국왕이 「인도 경사 생산금지령」을 폐지한 다음 해에 크리스토프 필립 오베르캄프(Christof Philippe Oberkamp, 1738-1815년)에 의해, 유명한 「쥬이 경사(toile de Joey」의 공장이 설립되었다. 오베르캄프의 부친인 필립 자코프는 독일의 하이브론 공장, 바젤 공장 등 각지의 염색공장에서 일하였고, 크리스토프는 11세 때부터 부친과 함께 견습공으로서 염색을 시작하였다. 1758년, 크리스토프는 20세가 되자 부친과 떨어져 단독으로 파리에 와서, 염색공장인 코탄사에 취직한다. 6개월간의 견습생으로 조판사, 조색사로서의 일을 경험한 후, 공장장이 되었다. 1760년 동생인 프레데릭이 파리의 염색공장 타반느사로 옮겨 조판사로서 활약하자, 결국 형제는 타반느사의 공동경영자로서 그 사업의 책임을 지게 된다. 1760년 이들은 가장 염색에 적합한 입지에 공장을 설립하기 위하여, 파리 교외의 뷰브르 강변에 위치한 쥬이로 이전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공장을 설립한다. 소위 「쥬이경사」를 위한 공장의 탄생이다(Patricia, 2000).
이 공동 경영자들은 공장설립에 이어 여러 가지 난관, 즉 자금부족, 주민에 대한 공해문제, 노동자의 확보 등을 극복하고, 당시 경사붐에 힘입어 점차 공장을 확장ㆍ발전시켜 갔다. 1764년에는 제1차 공장 이전과 확장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1790년까지 이어진다. 또, 1790년부터 1793년까지의 3년간에는 다른 염색공장에서는 예를 볼 수 없는 큰 작업장이 만들어졌다. 1층에는 목판, 동판 등의 날염공장, 2층에는 조판과 롤러와 창고와 도안가, 조판사의 방, 3층에는 디자인실 등이 갖춰졌다.
쥬이의 공장은 그후에도 발전을 계속하여, 공장면적, 노동자 수, 생산량 등이 늘어나, 실질적으로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제일의 날염공장으로서 그 명성과 규모를 자랑하게 된다. 「프랑스 경사」라는 책에 의하면, 1792년 이전의 쥬이 공장의 원적원부에는 종업원이 이미 854인(남자 612인, 여자 242인)에 달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중 도안가 7인, 조판사 66인, 색조합사 10인, 날염공 185인에 이르렀다고 한다. 1783년에 이미 오베르캄프의 공장은 프랑스왕조의 「왕립공장」의 칭호를 획득했는데, 문헌에 의하면 1806년과 1810년에는 당시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 공장을 예방하여, 레종 드뇌르 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Lee, 2011).
오베르캄프는 다양한 점에서 유럽의 날염직물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는데, 그 제일은 프린트공장의 운영에 대한 명확한 기업 폴리시를 실천한 점이다. 그는 항상 「제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제품이 사용되기 전에 새로운 발견을 시도하는 것」, 「정보를 경쟁상대보다 빨리 얻는 것」등의 폴리시에 철저했다. 그 때문에 그는 당시의 기업으로서는 드물게, 공장의 조직 관리에 힘을 쏟았고, 공장장과 현장감독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효과적인 인사관리와 작업 효율화에서 큰 효과를 거두었다. 또, 오베르캄프는 기업의 신용은 늘 일류제품을 생산하는 것, 고도의 품질을 가진 제품을 제작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고, 품질 개량과 관리에 고심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두가지 점에서 고심하였는데, 첫째 날염기술에 관한 기술적인 개발과 개혁이었고, 둘째 디자인면에서의 새로운 패턴제작이었다. Fig. 18 은 오베르캄프의 공장에서 1775년에 제작한 「인도풍의 꽃과 나비의 문양」이다. 1770년에는 동판을 프레스하여 날염하는 동판날염을 개발하여, 섬세하고 음영이 진한 패턴의 날염을 가능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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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printed indienne, Jouy(1775), Janiffer, 1995, p. 226.
1797년에는 동판의 롤러날염을 개발하여 날염공정 역사에 새로운 발전을 구축하게 된다. 오베르캄프는 영국의 토마스 벨 보다도 빨리 새로운 시대의 기술의 선구로서, 신규 개발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오베르캄프의 동판 롤러날염기에 의해, 「평판날염 42인분의 직인의 일을 롤러날염기로 하루에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그는 당시의 유명한 화학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염료와 마무리면에서도 큰 공헌을 하였다(Sano, 1999).
- 5.3. 쥬이 경사의 디자인 특성
쥬이 경사에 대한 오베르캄프의 디자인면에서의 공헌은 기술면에서의 개발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그의 공방도 초기에는 우아한 인도 경사의 묘사로부터 시작했고, 프로트 타입에 가까운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화가인 장 밥 티스트 유에(Jean Baptist Hue, 1745-1811년)를 디자인 담당 책임자로서 초빙하고 동판날염을 개발함으로써, 점차 인도 경사풍의 환상적인 모티브로부터 멀어지고, 서양적 투시도법에 근거한 풍경화를 에칭(etching)적 표현으로 그린 것으로 바뀌어 갔다( Fig. 19 ).
유에는 18세기 루이16세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고, 장식가였다. 원래는 동물을 잘 그리는 화가로 로얄 아카데미로부터 동물화가의 칭호를 받았다. 더불어 당시의 전원풍경을 그리는 작가로서도 알려졌다. 1762년에 왕립화가가 된 유에는 1783년부터 쥬이 공장의 주임 디자이너로 취임하고, 유럽산 경사의 지표가 될 수 많은 날염 도안을 그린 명작을 남겼다. 남프랑스의 전원풍경을 모티브로 한 「농장의 일」, 「플랑드르의 풍경」, 「사계의 기쁨」, 「방앗간 사람과 그 아들」 등에는 당시 농촌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모습이 극명하게 그려져 있다. 퍼스펙티브한 모티브의 배치, 단색농담에 의한 색의 음영 표현에는 판화의 수법이 충분히 활용되었다. 또한 그는 스토리가 있는 주제를 즐겨 그렸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에 오페라를 힌트로 한 「피가로의 결혼」, 소설로부터 착상을 얻은 「폴과 비지루니」, 사실을 기초로 한 「아메리카의 독립」, 「연맹제」 등이 있다. 그러한 작품은 어느 것이나 에칭 터치로 극명하게 그 이야기를 그렸고, 자연주의적이고, 사실적인 표현력에 넘쳤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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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ed by Jean Baptiste Huet(1786), Christa, 1992, p. 96.
그는 현대에 카메오(camieux)로 부르는 원형상의 가장자리 장식 중에, 서양풍의 인물과 그리스 신화, 동물 등을 극명하게 단색으로 그려넣는 신고전주의적인 패턴을 창작하였는데, 이 작품도 당시의 다른 날염 공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Sei, 2006).
- 5.4. 「뮤르즈 경사」의 탄생과 발전
18세기의 뮤르즈는 22평방 킬로미터의 면적, 인구 4,000명의 독립한 도시국가를 형성하였고, 스위스의 칸톤주와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알자스중에 있어, 프랑스왕국과 마주보고 있었다. 이 소국은 1세기 내에 프랑스의 맨체스터가 된다. 1746년 4명의 뮤르즈 젊은이가 면포의 날염공장을 시작했는데, 그 급격한 성장을 예측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들은 서로 일을 분담하였고, 사업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그 때문에 12년 후에는 이 공동 사업자들은 독립하여 각각의 공장을 만들었다. 뮤르즈에서는 1768년에 15개의 날염공장이 있었고, 1787년에는 19개가 된다.
1798년 뮤르즈는 프랑스령이 되었는데, 시는 그 법적인 중립에 있었다. 풍부한 물이 있는 바젤이라고 하는 재정적, 지리적 중심지에 가까운 점, 소금을 나르기 위하여 바젤과 로렌느지방을 연결하는 길이 뮤르즈를 통하는 점, 밀수품으로서 운반되던 날염포가 당시 프랑스로 운반된 점 등에 의해, 뮤르즈의 날염은 한층 발전했다. 19세기에는 뮤르즈도 알자스도 날염의 전성기를 맞았다.
Table 1 은 19세기 뮤르즈의 날염생산 상황인데, 생산량은 해마다 늘었으나, 목판에 대신한 동판 롤러날염이 보급되자 직인 수는 도리어 감소하고 기술적 진보를 보였다(Kanebou, 1994).
Production amount of toile Mulho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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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ion amount of toile Mulho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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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printed cotton kerchief, dyed Terkey red(1840), Janiffer, 1995, p. 227.
질적으로 알자스의 날염은 풍부한 문양물이었고, 비슷한 것을 생산했던 영국의 날염업자와 경쟁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뮤르즈에서는 공방에서 일하는 다수의 디자이너들이 존재하였고, 그 디자인은 이 지방 외에 리용과 영국 등의 섬유제품의 대중심지에서도 판매되었다. 뮤르즈의 디자인학교는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고, 1857년에 설립된 미술관은 자료센터의 역할을 하였다.
날염 직물은 뮤르즈가 국경에 가깝다는 지리적 위치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인도와 이탈리아에도 제품을 보냈다. 1815년 이후, 유럽시장이 부분적으로 닫혀지자, 프랑스시장이 확대되어, 일찌기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 등장하는 레나르 부인도 「뮤르즈 경사(toile de Mulhoues)」의 옷을 입었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 중근동, 동아시아의 시장이 획득되어, 이러한 시장에 적합한 제품이 만들어졌다. 1820~30년의 오스만왕조에 맞게 만들어진 터키 레드의 바탕색을 가진 면포는 그 좋은 예이다( Fig. 20 ).
1839년 뮤르즈의 날염공장은 40개에 이르렀다. 1840년에는 14,000명의 날염 직인이 활동하였고, 목판날염의 다색의 프린트 제품은 문양과 품질에서 영국과의 경쟁에서 이겼다(Sano, 1999). 이 뮤르즈 산지에서 특기할 것은 우수한 디자인의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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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for wool print in Mulhoues Textile Museum(1845), Kanebou, 1994, p.10.
과 보호를 위해, 산지 전체가 적극적으로 디자인의 수집과 보존을 행하게 된 점이다. 최초의 견본 수집은 이미 1833년에 다니엘 도르피스 오세에 의해 행해졌다. 그의 목적은 단순히 뮤르즈 산지만의 도안가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에 통용되는 우수한 도안가를 양성하는 것이었고, 그것에 도움이 되는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 방침에 따라, 우선, 뮤르즈 산지의 42개의 날염공장으로부터 우수한 디자인의 직물과 도안이 모아지고, 그후 많은 독지가와 기업가들에 의해 기부와 구매가 되었다. 그 결과 수 년이 안되어, 실로 800만점 이상의 자료와 실물 샘플이 수집되었고, Fig. 21 과 같은 컬렉션은 현재의 「뮤르즈 염직미술관」의 모체가 되었다(Kanebou, 1994).
6. 결 론
본 연구에서는 직물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가장 널리 사용되는 날염직물, 즉 경사(친츠)의 역사적 발전과 디자인을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고찰하였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 있었다.
1. 날염 직물의 기원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이집트의 날염 유물로 유추해 볼 때, 기원전부터 행해졌고, 날염업이 4세기에는 이미 직업으로서 확립되었다고 보여진다.
2. 면은 9세기 이후, 이슬람교도에 의해 유럽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되고, 이베리아반도에서는 10세기에 면화 재배가 시작되었다.
인도 면포와 날염 면포는 17세기 초기에 설립된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유럽시장에 운반되었다.
3. 영국 경사는 1676년에 시작되었고, 1783년 토마스 벨에 의해 로타리 프린트가 개발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1956년 퍼킨에 의해 최초의 합성염료인 모브가 발견됨으로써, 한층 정교한 문양을 선명한 색으로 표현해내게 되었다. 영국 경사의 대표는 19세기 빅토리아여왕시대의 「빅토리안 친츠」이다. 빅토리안 친츠의 주요 디자인 유형에는 아메리카의 새들, 종려와 야조, 화수문양, 스테인드글라스문양, 드랍 컬러 스타일, 라피스 프린트 등이 있다.
4. 프랑스경사는 「쥬이 경사」와 「뮤르즈 경사」로 대표되는데, 17세기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쥬이 경사는 18세기 오베르캄프에 의해 공장이 설립되었고, 1783년에는 왕립공장의 칭호를 획득하였다. 쥬이 경사를 대표하는 오베르캄프의 디자인은 처음 인도 경사의 묘사로부터 시작했으나, 점차 자신의 디자인 특성을 찾아간다. 그리하여 에칭과 같은 판화의 수법과 표현, 남프랑스의 전원 풍경, 스토리가 있는 주제, 신고전주의의 패턴 등과 같은 독창적인 디자인을 낳았고, 프랑스의 다른 날염 산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뮤르즈는 18세기 중기에 날염을 시작하여 뮤르즈 경사를 생산하였는데, 18세기 말에는 뮤르즈가 프랑스령이 된다. 1840년에 뮤르즈는 날염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고, 디자인학교와 미술관도 설립하였다. 800만점 이상의 자료와 샘플이 수집된 컬렉션은 뮤르즈 염직미술관이 되었다.
Acknowledgements
이 연구는 금오공과대학교학술연구비에 의하여 지원된 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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